<아는 여자> 삼인조의 하이퍼텍 수다
장진 + 정재영 + 이나영
2004.06.21 / 주성철 기자
장진 감독이 <킬러들의 수다> 이후 3년 만에 <아는 여자>로 돌아왔다. 이나영이 수다 패밀리에 빠진 사연, 그리고 장진 감독의 오랜 파트너 정재영이 허허실실 멜로영화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그들이 풀어놓는 길고 긴 수다 한판.
한때 잘나가던 투수 동치성(정재영)은 애인에게 갑작스런 이별을 통고받던 날, 설상가상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까지 받는다. 엉망진창이 돼버린 그는 단골 바에서 술 석 잔을 마시고 무너져 버린다. 눈 떠보니 여관방, 바의 낯익은 여자 바텐더가 그를 데리고 왔다. 얼마 뒤 그날의 사연이 라디오를 타고 치성의 귀를 울려댄다. 치성이 그저 '아는 여자'인 바텐더는 한이연(이나영). 알고 보니 10여 년 전 치성과 이웃사촌이 되면서부터 그의 발자국 수를 세어가며 조금씩 사랑을 키워왔던 순진하지만 무서운(?) 여자다. 이제 그들의 진짜 첫사랑이 시작된다. <킬러들의 수다> 이후 3년, 장진 감독이 '판타스틱 코믹 멜로'라 이름 붙인 <아는 여자>로 돌아왔다. 단 두 남녀의 뒤를 좇으면서 인물들의 밀도는 더욱 높아졌고, 장진식 코미디의 묘한 거리감은 더욱 큰 웃음을 낳는다. 이나영이 출연했던 TV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 '꽂혔던' 장진 감독의 희망대로 이나영은 흔쾌히 '아는 여자'가 돼주었고, 이제 눈빛만 봐도 장진 감독과 백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내추럴 본' 수다 패밀리 정재영은 장안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멜로영화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멋진 화음에 그들 역시 들떠 있다. 장진, 정재영, 이나영 모두 "사람들에게 어서 보여 주고 싶다"며 말문을 연다.
정재영이 멜로를?
장진 맨 처음 로맨틱 멜로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이미지적으로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남자 배우가 없었어. 단지 걱정은 야구 장면이 꽤 나오니까 기본적으로 자세가 나오는 배우였으면 좋겠다는 거였지. 지금도 재영한테 미안한 건 보통 내가 배우들에 대한 이미지 캐스팅을 좀 해놓고 시나리오를 쓰는데, 아무튼 재영은 아니었던 거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쓴 거였어.
정재영(이하 '재영') 작품 얘기 듣고 원래 저한테 카메오 해달라고 그러셨죠.
장진 그런데 참, <아는 여자>를 시작하고서 중간 편집을 해서 영화를 보는데, 주변 사람들하고 "와, 재영이 말고 다른 배우 썼으면 어떻게 될 뻔했냐" 하는 얘기를 했어. 그런 거 보면 임자가 있는 것 같아.
이나영(이하 '나영') 어떤 배우 쓸까는 제가 먼저였나 보죠?
장진 <네 멋대로 해라>는 정말 오랜만에 즐겨 본 TV 드라마였어. 물론 나영 씨가 잘했고, 뭐랄까 그 사람의 느낌이 바로 와 닿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만들어낸 게 아니라 바로 저 사람 자체의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번 내 영화에 담고 싶은 부분이 많이 보였지. <아는 여자> 떠올리면서 이런 유의 영화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성질과 아우라를 가진 배우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시나리오를 중간 정도 썼을 때 도와주던 친구하고 얘기를 나눴는데 거의 대안 없이 이나영이었지.
나영 <영어완전정복> 촬영 거의 막바지에 제의를 받아서 저도 좀 놀랐어요.
장진 제작 일지 보니까 내가 6월 12일에 시나리오를 보냈고 결정은 9월 17일에 했던데 뭘.(웃음)
나영 (웃음) 우선은 <영어완전정복>을 하고 있으니까 그 기간 동안은 다른 작품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부담감도 많았죠.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느낌은 굉장히 간결하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호기심이 많았죠. 여기에 감독님이 생각하는 다른 많은 요소들이 붙을 것 같았고 그게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어떤 영화가 될까, 정말 만나 보고 싶었어요.
재영 나 같은 경우 아까 말씀하셨듯이 사실 카메오 정도로만 출연할 줄 알았는데... 아 근데 지금 두 사람 누구랑 얘기하는 거예요? 내 얘기도 좀 들어줘요.(웃음) 현장에서도 참 계속 이런 분위기더니. 둘이서만 얘기하고.
장진 지금 둘이서 너 얘기하고 있어.(웃음)
재영 그렇게 둘이 따로 얘기하고 그래서 난 참 얘기할 사람이 없었어요. 아무튼 <아는 여자>에 장진 감독님이 직접 출연하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 그 형사 역할을 나한테 해달라고 하셨죠? 치성을 취조하는 형사로.
장진 후반부에 치성을 취조하는 형사가 대사는 짧지만 요령을 아는 사람이 해야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재영이 아니면 임원희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졸지에 재영이가 주인공이 돼버리니까 치성을 취조하는 형사로 원희를 쓰면 갑자기 <실미도>가 되는 거야.(웃음) 둘이 바로 앞에 했던 영화가 <실미도>인데 둘 다 여전히 머리는 박박 밀어버린 상태라 난감했지.
재영 아무튼 내가 나중에 그러고 나서... 아 진짜 또 누구랑 얘기해. 내가 계속 얘기하고 있는데. 또 둘이서만 얘기하네.
장진 아 그냥 좀 알아서 얘기해. 다 녹음되고 있어.
재영 <실미도>가 6월에 촬영이 끝났고 몇 달 있다 <아는 여자>를 했는데, 너무 재밌었고 내가 하게 된다니 좋았죠. 게다가 상대역이 이나영 씨라니까 망설일 필요도 없었고.(웃음)
장진 끝났으니까 얘긴데 심적으로는 재영이로 굳혔는데 외피적인 이미지가 <실미도>의 남성적인 게 세서 두려웠지. 굉장히 애먹었었어.
나영 그때 저는 상대역이 누군지 몰랐어요.
재영 아마 상대역이 나라는 걸 알았다면 안 한다 그랬을 거야.(웃음)
장진 맞어. 그건 나도 너무 이해가 돼.
재영 뭐가 이해가 돼요. 정말.(웃음)
이나영은 장진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재영 <아는 여자> 하기 전에 좋아했던 장진 감독 영화는 뭐였어?
나영 사실 그 전에 장진 감독님 영화 본 거 없어요. 그냥 그런 상태에서 했어요.
재영 어 정말? 그럼 뭘 믿고 한 거지?
장진 명절날 집에만 있어도 족히 한 편은 봤을 텐데... 사실 나도 <네 멋대로 해라> 말고 나영이 나오는 영화 본 적 없어서 할 말이 없네.
재영 허허 이거 참 두 사람....
나영 예전에는 보통 다른 감독님과 일할 때 영화를 보고 오는 게 기본적인 예의이고, 필모그래피를 꿴 상태에서 얘기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데 감독님도 내 영화를 본 적 없고 그래서 오히려 부담 없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이게 더 잘됐다고 서로 합의했죠.(웃음) 감독님 이전 작품들에 여배우 비중이 별로 없었다고 하는데 그런 평가를 먼저 듣고 영화를 보면 강박관념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킬러들의 수다>는 케이블 TV에서 우연히 두 신 정도 봤어요.
장진 <킬러들의 수다> 130신 정도 되거든?(웃음)
재영 그러니까 채널 돌리다가 '어 무슨 영화지? 아이 머야' 그러면서 또 돌렸겠지.
나영 외출하기 직전이어서 그렇게만 봤어요.(웃음) 그 두 신만 봤는데도 감독님 코미디의 스타일을 알겠더라고요. 막연하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 건너 건너 듣던 스타일이 보이더라고요. 계단 같은 공원에서 신현준 선배랑 동생들이 오페라 들어가기 전에 모의하는 장면이었어요. 아무튼 <아는 여자>는 그런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별로 그런 적이 없는 것 같거든요. 감독님도 본격적인 멜로영화는 처음이라고 그러셨고.
장진 그래서 주변에서도 약간의 조심을 당부하기도 했지.
나영 내가 유난히 여배우랑 함께 작업을 안 해본 감독님과 작품을 많이 했어요. <네 멋대로 해라>도 그렇고 TV 드라마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남자 캐릭터를 더 잘 묘사하는 분과 했어요. 그래서 저는 평소에 '내가 남자 같아 보이나 보다'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죠.
장진 듣고 보니 그러네. 아무튼 우선 시작은 그런 외피적인 것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게 너무 잘 어울린다, 예쁘다 하는 느낌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 언밸런스한 느낌이 나도 좋다고 봤어. 걱정한 건 분명 두 사람 다 자기 메소드가 있다는 거지. 물론 나도 <네 멋대로 해라>밖에 안 봤지만 나영이의 연기에는 정석적인 대사나 호흡이 아닌 다른 패턴이 보였어. 그래서 저 친구는 또 다른 방식으로 견고한 자기 것이 있구나 생각했지. 대사도 그렇고 연기 톤이 서로 안 맞으면 초반부터 힘들 거라고 봤어. 그런데 잘됐던 것 같아. 나영이가 조금 늦게 합류했지 아마? 3, 4회차 정도부터 들어왔으니까.
나영 맨 처음 커피숍 아르바이트 장면을 찍었고 재영 선배하고는 초반 여관 신에서 처음 만났죠.
재영 첫날 만나서 여관에 간 거네.(웃음)
<아는 여자>의 허허실실 코미디
재영 <실미도> 끝나고 한 달 정도 쉬고 또 바로 야구 연습했죠 아마?
나영 사실 저는 두 분이 야구 얘기하면 무슨 얘기인 줄 몰라요. 영화 속에서 이연이 보이는 모습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난 야구 얘기 나오면 일부러 더 관심 없게 안 들으려고 했어요. 사실 저는 시나리오 읽고 정말로 영화 속에 나오는 그 대사를 물어보고 싶었어요. 진짜 몰라서. 발야구는 좀 했으니까 1루에서 3루로 바로 가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땅볼' 같은 건 아직도 잘 몰라요.
재영 대사보다도 둘이 앉아서 진짜 어색하게 야구 얘기하는 것 자체가 되게 웃겨요.
장진 이번 영화에는 그런 상황들이 많지. 코미디의 강도만 보면 이전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모니터 시사 같은 걸 해보면 웃음의 횟수 자체는 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 <간첩 리철진>이나 <킬러들의 수다>는 대놓고 하는 코미디였어. 여기서는 무조건 웃겨야 돼, 생각했었고. 그래서 100명이 영화 보면서 한 10명만 이해 못해서 안 웃어도 불안하고 마음이 허했지. 그래서 내 영화가 참 혼자서 보면 재미없는 영화라는 생각도 했고. 그래서 <킬러들의 수다>까지 하고 나서 든 생각이 이번에는 편안하고 안전하게 코드를 알면 웃으면서 보고, 잘 몰라도 드라마를 쫓아가면서 별 지장 없이 볼 수 있는 그런 장치들로만 가자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코드들을 사람들이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
재영 저도 좀 그런 편이에요. 관객들이 눈치 못 챌 정도의 미세한 멜로 연기를 하는 것처럼 했어요. 오히려 재미있는 것도 더 재미있게 하려고 오버하면 재미없으니까 그걸 잘 조절해야 했죠.
장진 이별 통고받고 꼬장 부리는 오프닝의 상상 장면 빼고는 재영이가 작정하고 오버하는 코미디는 없지. 나영이는 그보다 더한 거고.
나영 사실 전 코미디 연기 못해요. <아는 여자>도 내 현실과 처지에 입각한 연기죠. 지금껏 영화를 하면서도 작정하고 코미디를 하려고 한 적도 없었고, 사실 <영어완전정복> 때도 그랬어요. 오히려 저는 그런 걸 보면서 사람들이 막 웃으면 좀 당황하는 편이에요.
장진 치성이 마라톤 대회에서 상품으로 김치 냉장고 타왔을 때 보이는 반응 같은 건 정말 귀엽고 웃겼어.
나영 치성의 말 못할 상황이 있고 사람들이 너무 공감하고 있는데, 김치 냉장고 타왔다고 이연이 좋아하는 장면을 같이 쳐주니까 사람들이 너무 마음 깊이 웃는 것 같았어요. 여운이 많이 남는 것 같았어요.
장진 그 장면은 내 작품 전체에서도 거의 유일한 애드립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고마웠지. 아까 말한 재영의 상상 신과 그 장면이 스크립에 한 줄 정도로만 표현된 거였어. "생각나는 대로 해봐,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내가 대놓고 주문했던 장면이었지. 김치 냉장고 장면도 그냥 이연은 이연스럽게 치성은 치성스럽게 했는데 앞과 뒤의 얼굴이 한 프레임 안에서 상반된 것이 둘 다 너무 귀여웠어. 나영의 "고맙습니다"하는 대사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앞쪽 재영 얼굴의 포커스가 좀 안 좋은 데도 바로 오케이 했지.
나영 실제 제가 평소에도 좀 그런가 봐요. 별 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 말에 사람들이 당황스러워 할 때가 있더라고요. <아는 여자>에서도 이연의 엉뚱함이란 게 너무 진지해서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너무 애절한 거죠. 이연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너무 긴장을 하게 되면 그 기운에 너무 깊게 생각하다 보니까, 나오는 말에 대해서 '어, 내가 이런 말 왜 했지?' 하는 상황이 많아요.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연의 어눌함이지만 이연 본인에게는 절실함이죠.
장진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정말 진지하게 했어. 웃겨서 웃긴 게 아니라 귀여워서 웃겨.
재영 이연이 잠깐 뭐 사러 나갔다가 경찰들이 몰려 있는 치성 집을 좀 살펴보고 오겠다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뭐 살짝 사러 나간 건데(웃음) 음악까지 들어가고 이연이 흘깃 쳐다보면서 거의 표정이 CF 보는 것 같았어요.
장진 그게 촬영 중반 정도였는데 사실 그때까지 어쩌면 이나영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인식 못했는지도 몰라. 흔히 나영이 광고 쪽에서는 톱 클래스 배우인데 그때까지 계속 드라마 샷으로만 나영을 찍다가 그 장면을 보니까, 역시 이나영이구나, 왜 톱 클래스인지 알겠더라고.
재영 그런 장면도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너무 남발되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좋았던 것 같아요. 자칫 하면 반응이 싸~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더 힘이 붙었던 것 같아요. 그건 배우의 힘이기도 하고 <아는 여자>의 코미디가 보여 주는 압축의 힘이기도 하고.
장진 아무튼 정말 난 이번 영화의 코미디에 대한 반응이 궁금해. 걱정되는 건 리뷰야. 코미디 말고 드라마의 게임도 잘 안 놓쳤다고 생각하는데 즐기는 시선으로 안 보고 심각하게 들어가는 시선으로 보면 '장진의 네 번째 영화'라는 측면에서 실망할 수도 있지. 보통 난 매 영화마다 리뷰를 보고 힘을 많이 얻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걱정이야.
장진이 달라졌다?
재영 <아는 여자> 하면서는 감독님에 대한 느낌이 예전과 좀 달랐어요. 장르도 달랐고, 힘을 빼고 가자, 드라마가 안 잡히게 가자고 늘 말씀하셨고. <킬러들의 수다>나 이전 영화들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걸 나영 씨나 저나 이해했죠. 그래서 이번에는 코미디적인 상황보다는 드라마나 캐릭터의 감정에 가장 깊이 들어간 것 같아요. 지금까지 감독님은 배우들의 신체나 표정까지 세밀하게 터치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신체에서 보이는 캐릭터의 느낌이나 디테일도 많이 쓰시더라고요. 저는 그게 좋았고 잘 맞았어요.
장진 아무래도 내가 그랬던 건 <아는 여자>가 내 이전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한 프레임 안에 가장 적은 수의 인물이 나오기 때문이었어. 사실 두 사람 말고는 주변 인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킬러들의 수다>만 해도 기본이 4명이었고 <간첩 리철진>은 대여섯 명이었고 <기막힌 사내들>은 8명이었어. 그래서 이번에는 안 해봤던 시도라 상세한 부분까지 보게 되고 불안한 점도 많았지.
나영 저는 두 분과 달리 무조건 받은 시나리오와 영화적인 요소들만 봤어요. 장진 감독님과는 처음이니까 너무 재미있을 거 같았죠. 다른 영화할 때는 리딩과 리허설이 반반이었다면 이번에는 리허설이 80~90% 이상이었죠. 거기서 많은 걸 가져가려 하시고 나는 리허설 때 그걸 다 못 뱉어내는 것 같아서 차이가 좀 있었어요. 나중에는 절충하고 나를 많이 이해해 주셔서 좋았죠. 리허설 때 "이 느낌 알지?" 그러시면서 억지로 안 시키고, 그걸 다 기억한 채로 현장 가서 해보는 식이었죠. 그런 것 때문에 처음 시작하는 게 어려웠고 다른 영화할 때보다 하루 동안 더 많은 분량을 찍는 것 같아서, 과연 내 속에 이연의 느낌이 살아 있는지, 그저 지금 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혼자만의 불안감이 커 만족감이 적었어요. 감독의 오케이 사인만을 믿은 거죠. 그게 맞는 거니까. 리허설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정작 현장에서는 테이크를 많이 가시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소품 쪽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고(웃음) 중간중간 조르기도 많이 했는데 아무튼 전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많았어요.
재영 지금껏 감독님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쓴 희곡도 모조리 다 읽었는데, <아는 여자>는 특정한 부분을 집어낼 수 없을 정도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좋았어요. 이전보다 편안하고 부드럽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죠. 영화를 보면 예전보다 음악도 훨씬 많고.
장진 이번에는 가사 있는 음악을 많이 썼어. 과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했어. 자연스럽고 좋았어. 그래서 배우들한테 한 구절이라도 외워라, 듣고 좋으면 인터넷에서 찾아서 들어라, 했지. 보통 가사 있는 영화 음악이 엔딩이나 클라이맥스에만 나오는데 그런 낯설음 때문에 안티가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난 별 문제 없다고 봤어.
나영 저는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오프닝에서 이연이 치성을 여관에 혼자 두고 나오는 장면이 너무 좋았어요. 굉장히 어려운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애절하게 느껴졌죠.
재영 예전에는 현장에서 대사 하나 틀리면 "이런 기라성 같은 대사를 틀린다"며 뭐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별로 그런 말 안 한 것만 봐도 감독님이 분명 변한 것 같아요.
나영 나도 처음 그 말 듣고 되게 놀랐는데.(웃음) 대단하시다 그랬죠.
재영 우린 매번 들어왔기 때문에 뭐... 아무튼 이번 영화는 다른 작품할 때보다 감독님한테 가장 불만이 없었던 작품이에요. 다른 작품 때보다 내 말을 가장 많이 들어 주셨고 또 반영해 주셨고. 진지하게 들어 주고 포용력 있게 해주셨죠. 이전 작품하실 때는 딱 치밀하게 연극하듯 그 틀에 박혀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교감이 중요하니까 조금 풀어주셨죠. 그런데 또 변하신 건 촬영 끝나면 무조건 집에 갔다는 거죠. 다른 영화 때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술을 잘 못하지만 늘 자리가 마련됐는데, 이번에는 지갑에 카드 상태가 안 좋으신지 굉장히 모범적인 생활을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속으로 이번에는 참 냉정한 스타일로 찍네,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현장 분위기가 바뀐 건 나영 씨가 들어옴으로 해서 바뀐 부분도 있어요. 현장에 나영이 등장하면 그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죠. 촬영감독도 나이가 젊고 하니까, 연세가 있으신 촬영감독이면 "어, 나영이 왔어, 어이구 귀여워" 뭐 그런 식일 텐데 스탭들도 다들 나영이를 여자로 보더군요.(웃음)
나영 그래서 난 서운한 게 많아요. 전에는 시간 없어도 현장에서 많이 놀았어요. 스탭들하고도 얘기 많이 하고. 현장에서 배우로 있는 시간보다 그냥 평범하게 있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들 내가 있으면 서로 되게 '뻘쭘'해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모니터 외에는 다른 데 가서 말 시켜도 자기한테 말 거는 줄 모르기도 하고. 괜히 계속 먹을 것만 갖다 줬죠.
장진 그래도 내가 그동안 최종원, 양택조 그 대선배님들 하고 유오성, 신현준 같은 배우들을 겪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는데 이번에 기록을 세웠어. 소주를 한 병이나 먹었지.
재영 다 나영 씨 때문이었죠. 나영 씨가 먼저 서너 잔 마셔서 자기도 취하니까 막 먹였어.
장진 그래서 촬영 끝나고 나영 씨 만날 일 없어지니까 건강 많이 좋아졌어.(웃음)
따로 또 같이, 한 걸음 더
장진 멜로영화로 시작했지만 애시 당초 사랑의 정의라든가 그런 고정된 것으로 영화를 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이 너무 많이 가르쳐줬지. 포기할 건 포기하고 상업 영화 시장 안에서 장르의 성격에 맞게끔 풀자는 생각이었어.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화를 봐도 여러 수작들이 보이지만 강요가 없잖아. 그런 게 좋았어. 그래도 앞으로 이런 유의 영화는 잘 안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멜로드라마도 등장인물이 많아야 3명인데, 이런 거 말고 원 톱을 두고 함께 가는 집단주의 영화나 남성주의 영화가 마음이 편해. 내가 이번처럼 중간중간 탄력 없이 영화를 풀어간 적도 없는 것 같아. 현장 편집을 하루라도 계속 보고 마무리를 지어야지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어. 그래서 당분간은 두 명이 나오는 영화는 좀처럼 안 할 것 같아. 최소 주인공 5명?(웃음)
나영 그런 영화로는 제가 대선배네요.(웃음)
장진 이번에 느낀 건 나영 씨 캐릭터가 작품적으로 주로 이성 간의 부딪힘을 많이 연기했는데 동성 간의 갈등이나 어떤 집단의 개체로서 보여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나영 사실 그런 시나리오가 없어요. 여자들은 캐릭터가 여전히 한정적으로 잡혀 있어요. 남자들은 나이별로 각각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있는데. 나 역시 해본 게 몇 개 없으니까 정말.
재영 20대 후반이 되면 그런 게 꽤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는 폭이 좀 더 넓어질 것 같아.
나영 내가 지금 두 분보다 선배라는 얘기하고 있는데 얘기가 다른 데로 가네.(웃음)
장진 아무튼 나는 <아는 여자>를 빨리 보여 주고 싶어. 코미디뿐 아니라 여자 캐릭터로 이렇게 많이 나가본 영화도 이번이 처음이라서.
재영 저도 이런 역할 처음이라 마찬가지 기분이에요.
장진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웃음)
재영 아 왜 이러세요 정말. 제가 얘기를 안 해서 그런데 요즘 저한테 멜로 많이 들어온다니까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요즘엔 계속 멜로만 들어와요. <아는 여자>도 약간 그런 편인데 요즘 추세가 멜로 같지 않은 멜로인가 봐요. 그래서 요즘 제 시대가 멜로 쪽에서 오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누구나 다 멋있고 그런 게 아니라 일상의 멜로, 보통 사람의 멜로 말이에요. 지금은 다음 달에 무대에 오를 연극 <택시 드리벌>을 열심히 연습 중이고.
나영 나도 카메오로 나와요. 매 공연마다는 못 나오겠지만 적어도 한 다섯 번 정도? 그리고 차기작이나 앞으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재영 CF만 해도 벌써 몇 개 정한 것 같은데 부러워 죽겠어.(웃음) 세탁기 같은 건 웬만하면 나랑 같이 해.
나영 하긴 오빠는 촬영장에서도 밥 먹을 때 햇반 먹듯이 먹었죠. CF 들어왔을 때에 대비한다고. 그냥 주스를 마셔도 "캬~" 하면서 전형적으로 마시고.(웃음)
재영 나는 영화 속의 매 장면을 CF 들어온 걸 가정하고 연기해. <아는 여자>에서 자살하려고 마라톤 뛰는 장면도 감정보다는 어떻게 스포츠맨으로서 CF가 들어올 만하게 보일까 신경 썼지. 그래서 사람들이 보면 "야 저놈 목마르게 달리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웃음) 시사회 때 광고주들 좀 오시나 모르겠네.(웃음)
장진 (웃음) 나도 뭐 일단은 <택시 드리벌>에 주력하고 앞으로 또 다른 걸 생각해봐야지. 예전에는 종종 "50억을 불태우는 장면이 없는 한 대규모 예산 영화를 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뭐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지금껏 한 네 편 정도 영화를 하고 보니 돈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쓰는지 좀 감이 와. 그래서 다음에 큰 그릇, 큰 덩치의 제작비를 운반할 때도 그 돈을 요소요소에 잘 배치할 요령이나 자신감이 생겨가고 있어. 예전에는 그런 능력이 없고 큰 비주얼을 찍어낼 자신이 없어서 그런 얘기들을 했는데 이제는 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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