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취향/TINKER

[성석제 작가] 내 소설속의 사랑. 성석제 ‘첫사랑’

duda_ 2016. 9. 12. 18:21

[내 소설속의 사랑]성석제 '첫사랑'

 

내가 아는 한 경상도 출신 사내들은 좀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아니 ‘쓰지(用)’ 않는 게 아니라 ‘하지(言)’ 못한다. 삼십여 년 전부터 내가 알아온 어떤 분이 있다. 사업 수완도 뛰어나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았으며 슬하의 자녀들도 수석 졸업과 수석 입학을 떡 먹듯 했다. 막내아들이 대학에 수석 입학하던 날,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나한테 딴 건 더 필요 없다. 남편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이라도 듣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 말을 출가한 딸에게 전해 들은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사내가 어떻게 터진 입이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단 말이냐.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오래도록 내게 사나이 언행의 전범으로 남아 있었더랬다. ‘둘이 살다 하나가 죽어도 말을 못 하겠다니 경지는 경지구나’라는 게 내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사랑이란 말을 한 번도 쓰지(記) 않고 처절하고 열렬하고 하나밖에 없으며 영원한 사랑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구경(究竟)이겠다. 나는 이런 구경을 향해 어제도 오늘도 전진하는 구도자이기는커녕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싶어도 잘 쓰지 못하는 쪽이다. 

이런 내가 소설에 사랑을 힘들게 담으면 으레 듣는 말이 ‘나는 그게 네 이야기인 줄 지난 여름부터 알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다. 지난 여름이 아니라 삼십년 전 가을부터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더 세게 나온다. 그 뒤로는 아예 그런 반응을 염두에 두고 쓰기도 했다. 

나의 ‘또 속을지어다’와 독자의 ‘나는 그게 네 이야기인 줄…’의 즐거운 길항. 이런 것이 사랑을 담은 소설을 쓰고 읽는 재미의 일부가 아닐는지. 어떻든 제목에 ‘사랑’이라는 말을 등장시킨 소설이 내게 하나 있다. ‘첫사랑’이 그것인데 미리 말해두자면 내 첫사랑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니 이 소설 속의 첫사랑은 절대 나의 첫사랑이 아니다.

소설 속의 ‘나’는 평온한 농촌마을에서 대도시 변두리의 중학교로 전학을 한다. 공단과 그 배후지의 벌집 동네에서는 매일 매시 먼지와 연기가 피어오른다. 쓰레기와 오물이 곳곳에 버려져 있고 과일나무도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나’는 전학을 하면서 이곳이 ‘지옥’이거나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운명이 구색을 갖추어 준 것인지 ‘나’는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지옥중학교’ 안팎으로 골고루 명성을 떨치는 깡패에게 얻어터지게 된다. 얻어터진 장소에서 우느라 수업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수업을 빼먹고 있던 ‘너’라는 녀석에게서 바라지 않던 이해와 위로를 받게 된다. 물론 ‘나’는 그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는 학교에서 가장 힘센 깡패로부터도 존중을 받고 있는 힘 있는 친구다. 그렇다고 깡패 중의 상깡패는 아니었고 온몸에 털이 많이 나 있다는 이유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삼손(Samson)처럼. 이 삼손 같은 친구는 델릴라(Delilah) 같은 어여쁜 여학생을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어쩌자는 것인지 남자중학교 3학년생인 ‘나’를 쫓아다닌다. 

교실에서는 뒷자리에 앉고 하교길에도 뒤를 졸졸 따라오다가 ‘나’가 세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구원해주고 배고프면 빵을 사준다.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 ‘나’는 ‘너’가 보여주는 사춘기 소년들의 사소한 악행에 가담하게 되는데 ‘너’는 그런 과정에서 망치로 얻어맞아 멍이 들고 목욕탕 뒷담 유리조각에 엉덩이를 찢기기까지 한다(이런 게 진짜 나의 경험담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궁금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쉽게도. 사실 이런 일화에 작가의 진실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떻든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 ‘나’는 그 사랑을 간단하게 동성애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성애가 아니라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다. ‘너’가 델릴라 같은 여학생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일단 이 사랑은 어긋난다. 초조해진 ‘너’는 ‘나’에게 자신의 위력과 장기를 과시한다. ‘너’는 자신이 이미 성인이나 다를 바 없으며 중학교 앞의 ‘빵집 처녀’와 자신과의 성관계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나’는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무시해 버리지만 ‘너’가 말한 날짜가 되자 학교 뒤 야산 으슥한 장소에 ‘너’와 ‘빵집 처녀’가 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가서 숨어 있다. 거기서 ‘나’는 ‘너’인지 누구인지 모를 한 사내의 육신에 깔린 ‘빵집 처녀’의 흡뜬 눈과 대면한다. 

드디어 ‘나’도 사랑에 빠진다. ‘나’에게도 첫사랑이 찾아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처녀를 사모하는 총각의 사랑과는 같지 않다. 훔쳐보던 눈과 훔쳐보는 사람을 보고 놀란 사람의 눈 사이의 사랑이다. 훔쳐보던 눈의 짝사랑이다. 당연히 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출발부터 불완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도 어긋난다. 

이처럼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행동은 늘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그와 그들의 사랑은 어긋난다. 절망한 ‘너’는 무슨 짓을 저질러 퇴학을 당하고 ‘지옥’의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며 방황한다. 기차 기관사처럼, 원양어선 선장처럼, 우주인처럼. 그러다 마침내 ‘너’는 입시를 치르고 지옥 바깥의 고등학교로 가게 된 ‘나’에게 찾아온다.

학교 운동장에서 ‘너’는 ‘나’에게 “어디 가니?” 하고 묻는다. ‘나’는 “너는?” 하고 반문한다. 그 다음의 대사는 ‘너’의 “한 번 안아보자”는 제안이고 즉각적인 ‘나’의 “그래”라는 호응이다. ‘나’를 안았던 ‘너’는 조금 더 가까이 ‘나’를 안기 위해 급히 외투 단추를 푼다. 나는 다시 한번 우주의 입구처럼 열린 ‘너’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사랑한다”고 ‘너’는 말한다. “나도”라고 ‘나’가 응답한다. 

마지막 순간에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룬 것일까. 모를 일이다. 두 사람 다 이 포옹이 끝나면 헤어져 영원히 못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가 지옥을 떠나게 된 것 때문에 너그러워져서 말로만 동조한 것은 아닐까. 모를 일이다. 소년들의 사랑이 이성애나 어른들의 사랑과 같은 것일까. 모를 일이다. ‘좋아한다’의 강한 표현은 아닐까. 사실 나도 모른다. ‘너’는 결국 ‘나’의 분신은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는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에 바깥 세상을 구경하러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머스마’였다. 칼리아 지방까지 간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맑고 아름다운 호수에 닿았는데, 그 호수에는 살마키스라는 님프가 살고 있었다.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첫눈에 반해 구혼을 했지만 아직 사랑을 모르는 ‘머스마’는 거부했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부(異父) 형제이기도 한데 이때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가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는 틈을 타서 몰래 그의 몸을 껴안고는 한몸이 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이 기도가 이루어져 둘의 몸은 하나가 되었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의 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열다섯 살의 소년들 가운데서 헤르마프로디토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소설을 쓰면서 ‘영원한 소년’ 아르튀르 랭보를 연상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세계명작시선의 프랑스 편에서 ‘새벽’, 아니면 ‘나의 방랑’을 읽기 전에 로트레아몽 백작의 장시 ‘말도로르의 노래’인가에서 ‘에르마프로디뜨’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이상할 것까지는 없지만 나는 그 시를 읽고 난 뒤 스무 해 가까이 에르마프로디뜨를 랭보와 결부시켜 왔다. 랭보는 공교롭게도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라는 산문시집의 저자이기도 하다. 생년 순서로 배열한 듯한 그 시선집에서 로트레아몽 백작의 앞에 있던 시인은 폴 베를렌이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살마키스가 있었듯 소년 랭보군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유부남 베를렌씨가 있었다. ‘너’에게는 ‘나’가, ‘나’에게는 ‘빵집 처녀’의 눈이 있었다.

이 소설을 쓰던 그때, 1995년 12월, 소설가로서의 나는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었던 것 같다. 느낌으로는 이십대 중반쯤 된 지금도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잘 쓰지(記, 用, 言) 못한다. 모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써서 식상했는지도. 누가 아시는지, 내가 지난 십여 년 동안 여름에 한 일을.

 

+이 작품은 성석제의 후배로부터 전해들은 에피소드에서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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